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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한 탈북자가 고국을 떠났습니다. 현재 그는 여러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캐나다 건설 회사의 사장입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비즈니스 소유자가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남진혁이 북한에서 공개 처형을 목격했을 때 그의 나이는 16살에 불과했습니다.

남진혁: “30대 여성이 시장에서 총에 맞았습니다. 그녀의 범죄는? 할머니를 폭행한 뒤 마른 오징어를 훔쳤습니다.”

10대 진혁이 처음 목격한 공개 처형은 끔찍했습니다.

남진혁: “몇 명이나 됐는지 아세요? 열다섯 명, 한 명당 세 발씩. 이 여자는 자신이 처형될 줄 몰랐을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오열했어요. 그 피 냄새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진혁은 20대가 되기도 전에 청진 비행장에서의 공개 처형, 청진 기차역에서의 죽음, 국경 강변에서 떠밀려온 시신 등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들었습니다.

진혁이 처한 상황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학에 뛰어난 수재였던 진혁 씨는 군대, 특히 해군에 입대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계모의 고소로 아버지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면서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새어머니가 들어온 이후 거리에서 생활하던 진혁에게 북한은 희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죄가 자식의 죄가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진혁 씨는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2년을 보낸 후, 그는 중국에 영구적으로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북-중 국경에 위치한 한인 교회를 통해 헤이룽장성에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공사장 옥상에서 작업 중인 남진혁 씨
공사장 옥상에서 작업 중인 남진혁 씨

중국

농장에서 성실히 일하며 주인의 신임을 얻은 진혁은 딸만 있는 집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양부모님 덕분에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던 중국에 정착한 지 4년 후인 2006년, 진혁 씨는 중국을 떠났습니다.

신고하면 언제든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진혁은 브로커와 연결해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향했고, 한국에서 진혁은 동료 탈북민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인해 한국에서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진혁: “출근하는 길에 사람들이 ‘야, 너네 쪽에서 해고한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내 편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러자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했다고 하더군요. 그제서야 제가 북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결국 진혁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에서 동료 한국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태아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부모의 출신 성분 때문에 배척당하는 탈북민 가정의 자녀들을 보며 그는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아이가 이런 굴욕을 견디기 싫어서 떠났어요.”

결국 진혁은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캐나다에서 진혁 씨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는지 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방송사인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에 전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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